반응형 SMALL 역사공부31 비잔티움 제국(1) - 제국 명칭의 유래 우리는 로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비잔티움 제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로마 제국이 말기에 가서 휘청거릴 때 이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두 명의 황제가 있었다.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와 ‘콘스탄티누스(306-337)’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을 분할통치를 시작하였다. 두 사람의 황제와 그 밑에 부황제를 두었다. 이를 4제통치라고 한다. 아마 이때 부터 동서로마가 나뉘게 된게 아닐까 생각된다. 로마제국이 멸망했다고 했을 때는 보통 ‘서로마’제국의 몰락을 의미한다. 비잔티움이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다. 그리스의 옛 식민지였던 비잔티움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수도를 세웠다. 아래의 지도에서 ‘비잔.. 2021. 6. 7. 중세 농노의 기원 중세 장원의 농민은 대부분이 농노였다. 그렇다면 농노는 무엇일까? 익숙하지 않은 명칭이다. 농민일까 아니면 노예일까?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정치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 중에 하나는 일반 시민들의 생활을 돌봐준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는 노예가 바탕이 된 사회다. 아테네나 스파르타 모두 노예가 일반 생활을 뒷받침 해주었다. 아테네 같은 경우는 노예 덕에 민주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스파르타 노예)덕에 군사정치를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중세의 농노는 농민과 노예가 합쳐진 의미다. 농노의 기원은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로 올라간다. 황제(디오클레티아누스)는 미리 예산 총액을 결정하여 이를 관할 속주에 할당하고, 속주는 이를 다시 각 도시에 할당하였다. 도시.. 2021. 6. 2. 중세 봉건제 중세의 봉건제는 두가지 맥락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적 입장에서 봉건제, 경제적 입장에서 장원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중세를 이해할 수 있다. 9세기에 프랑크 왕국을 둘러싸고 대내외적으로 위기였다. 대내적으로는 두 번의 조약을 통해 세개의 국가로 나뉘었고, 대외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확산, 마자르족과 노르만족의 침입 등이었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국가에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에 사람들이 스스로 무장을 시작했다. 기사가 되거나, 기사의 보호를 받거나, 부유한 사람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세 ‘봉건제’가 생겨났다. 봉건제는 권력을 가진 주군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에게 토지를 수여하는 제도이다. 주군과 신하의 관계를 ‘주종관계’라고 한다... 2021. 6. 1. 프랑크 왕국의 발전과 분열 지난번 포스팅에서 카롤루스 마르텔이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물리쳤다고 했어요. 이슬람 세력을 물리쳐준 영향으로 교회와 돈독해졌어요. 카롤루스 마르텔에게는 피핀이라는 아들이 있어요. 피핀은 유약해진 메로베우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루스 왕조’를 세웠어요. 피핀은 카롤루스 마르텔 보다 교회 세력과 더 돈독하게 지냈어요. 사실 왕조를 개창할 때도 로마 교회가 지지해주었기에 수월하게 진행되었어요. 피핀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탈리아 중부의 라벤나 지역을 롬바르드족으로부터 빼앗아서 교회 및 교황에게 기증하였고 그곳이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어요. 피핀 다음으로 카롤루스 대제가 왕위에 올랐어요. 그리고 그 시기가 영토확장, 문예 부흥 등으로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였어요. 프랑크왕국의 수도는 아헨이었어요... 2021. 5. 31.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