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역사를 어려워하는 이유중 하나는 아마도 연도 문제일거에요. 그래서 많은 질문을 받곤 해요. '꼭 연도를 외워야하나요?' 연도 자체만 봐도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학생들이 많을거에요. 해주고 싶은 말은 연도를 꼭 외워야하는건 아니에요. 그러나 연도를 알거나 이해하는것은 '시대'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거에요. 역사를 공부하는 데 하나의 '도구'를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연도 혹은 시대는 역사를 공부할 때 숲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저는 숫자는 조금 어려워하는데 연도는 조금 좋아해요. 특히 같은 시기에 동서양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연결할때 희열을 느껴요. 여러분들도 시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도와 조금 익숙해지면 좋겠어요.
1차 아편전쟁(중영전쟁)은 1840년~1842년에 발생했어요.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는데요, 인도를 통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게 했었죠. 당시에 이러한 무역형태와 전쟁을 영국 의회에서 반대하기도 했어요. 역사상 가장 치졸한 전쟁이라고 비판하면서요.
중국에서 17세기 초부터 시작된 아편 흡식 풍조는 18세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모든 계층에 퍼져나갔다. 거듭되는 아편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830년대 후반 아편중독자 수가 최초 200만으로 추산될 지경이었다. 더구나 관료, 병사들의 아편흡식은 부패, 국가기강의 해이와 전투능력의 상실로 나타났다. 또한 빈민층의 아편흡식은 농촌경제의 파탄을 야기했다.(한국인을위한중국사 281-282p)
위의 글 처럼 당시 청나라는 아편으로 병들어 가고 있었어요. 병사들이 아편을 흡식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보나마나 뻔하겠죠? 적들이 공격할때 싸울 힘이 사라지니까요.
이러한 아편의 문제점으로 인해 중국 정부는 아편의 수입을 금지했어요. 그러나 금지가 무색하게 아편을 피우는 사람들은 더욱 증가했어요. 어떻게 증가했을까요? 정부에서 아편 수입을 금지하자 아편을 밀수입하게 되었어요. 아편을 밀수입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부패한 청나라 관리들이었어요. 아편을 사들이기 위해 막대한 은을 사용했어요. 그 은은 인도를 통해 영국으로 흘러 들어갔어요.
은의 유출, 아편 중독으로 인한 국가 기강의 해이 등이 겹치자 청나라가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어요. 두가지 대책안이 나왔어요. 통제론과 엄금론이에요. 단어만 보아도 느껴지지 않나요?
관리들 중 다수가 아편의 흡식과 아편 수입을 하루 아침에 그널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아편 수입을 합법화해 징세하고 아편대금을 은이 아닌 물품으로 지급하며, 양귀비 재배를 허락하고 관리와 병사에게만 흡식을 금지시키자는 '통제론'을 지지했다. 반면 일부 관리들은 일정한 교정기간을 둔 후 아편흡식자를 엄중하게 처벌함으로써 아편을 금하자는 '엄금론'을 지지했다.
위와 같은 두가지 안을 받아든 당시 청나라 황제 '도광제'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도광제는 아편 흡식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고 싶었나봐요. 엄금론자 중 하나였던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광동에 보내 아편문제를 해결하도록 보냈어요. 임칙서는 광동에가서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도광제는 왜 임칙서를 광동으로 보냈을까요? 지난 포스팅을 기억해보세요! 청나라는 외국과 무역의 창구를 광동으로만 지정을 해뒀어요. 광동무역체제였기 때문에 광동으로 보내게 된거에요!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다음에 이어할게요.
* 인용한 것과 사진의 출처를 밝혀둡니다.
*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 참고문헌 :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위한중국사, 서해문집, 2004, 281-282)
* 그림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아편전쟁'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33034&cid=62059&categoryId=6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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