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공부

중세 농노의 기원

by Sueña. 해나 2021. 6. 2.
728x90
반응형

중세 장원의 농민은 대부분이 농노였다. 그렇다면 농노는 무엇일까? 익숙하지 않은 명칭이다. 농민일까 아니면 노예일까?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정치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 중에 하나는 일반 시민들의 생활을 돌봐준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는 노예가 바탕이 된 사회다. 아테네나 스파르타 모두 노예가 일반 생활을 뒷받침 해주었다. 아테네 같은 경우는 노예 덕에 민주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스파르타 노예)덕에 군사정치를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중세의 농노는 농민과 노예가 합쳐진 의미다. 농노의 기원은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로 올라간다.

황제(디오클레티아누스)는 미리 예산 총액을 결정하여 이를 관할 속주에 할당하고, 속주는 이를 다시 각 도시에 할당하였다. 도시에서의 증세책임은 시참사회가 지고 부족한 액수는 참사회원이 보충해야만 한다. 과거에는 명예직으로서 원하는 시민도 많았던 참사회원직도 이제는 큰 부담이 되어 이를 면하려는 사람이 많아 그 직책을 고정시키고 세습화하였다. 증세의 부담은 비단 참사회원만이 아니라 모든 상인과 수공업자들에게도 미쳤고, 그들 역시 이를 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리라여 그들의 직업 또한 고정되고 세습화 되었다. (서양사 개론 128p)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행정과 군대 개혁을 대개적으로 실시했다. 개혁은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특히 경제적인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데, 이는 모두 시민들의 세금에서 나온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예산을 계획해 놓았기 때문에 그 금액을 맞추기 위해 시민들이 이곳 저곳에서 돈을 구하거나 구하지 못하면 책임을 미루는 행동이 보인다. 이에 황제는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신분을 고정 시켜 놓았다.

세금은 물론 대지주나 황제령의 경영자에게도 할당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들의 소작인이나 소농들이 부담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역시 토지를 포기하는 현상이 생기자 그들을 토지에 결박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증세에 허덕이던 끝에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유력한 대지주의 보호를 구하는 소농과 소작인도 생겼다. 이리하여 ‘콜로누스’제라는 토지에 결박된 예농적인 소작제가 생겼다. 또한 노예에게도 토지를 주어 지주에게 소작료를 물게 하는 ‘콜로누스와 유사한 노예’도 증가하고, 농장에서 해방된 노예도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본래 자유인이었던 콜로누스와 신분상으로는 달랐지만, 다 같이 중세의 농노의 선구적인 존재가 되었다. (서양사개론128-129p)


이렇게 농노는 하나의 기원이 아니라 여러가지가 중첩되어 생겨났다. 결국은 농노는 세금에 허덕이거나, 농민이 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유래였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농노가 갖는 성격과 농노의 하루를 알아보고자 한다.

* 참고문헌
1)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9, 128-129p.

LIST

'역사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잔티움 제국(1) - 제국 명칭의 유래  (2) 2021.06.07
중세 농노의 생활  (0) 2021.06.03
중세 봉건제  (0) 2021.06.01
프랑크 왕국의 발전과 분열  (0) 2021.05.31
프랑크왕국  (0) 2021.05.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