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3. 에세이
라면
아홉 살 무렵의 어느 주말, 엄마가 점심으로 라면을 내왔다. 그러나 아빠는 면이 얇고 뽀얀 국물의 국수를 드셨다. 이상하게 아빠는 항상 라면 대신 국수였다. 라면은 종류도 다양하고 때로는 까맣게 비벼먹을 수도 있는데 왜 하필 국수만 고집할까. 가족 모두가 같은 음식을 먹었으면 하는 생각에 아빠의 국수는 항상 거슬렸다. '아빠는 나이가 많아서 그래, 라면은 어린이나 먹는 음식이야'라고 치부하곤 했다. 아빠도 라면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맛있는 라면을 말이다. 그리하여 아빠를 설득하기로 했다.
'아빠, 오늘은 같이 라면 먹자, 응?' 아빠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고개를 바짝들고 말을 했다. 아빠는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씨익 웃기만했다. 몇날 며칠을 쫓아다니자 아빠는 귀찮았는지 나를 봉당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라면 면발의 모양이 어때?' 갑자기 면발의 모양이라니, 이게 무슨말이지?
'음, 라면은 꼬불꼬불해, 파마머리 같이'
'맞아 라면은 꼬불꼬불하지, 그럼 라면을 끓이면 어때?'
'라면은 끓여도 꼬불하지!' 끓인 라면을 젓가락 이용해 들어올리는 순간에도 면발이 축 쳐지지 않고 탱글탱글하게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니 말이다.
'그치? 라면은 끓이기 전에도, 끓인 후에도 꼬불꼬불해. 아빠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그 비밀을 듣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비밀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유혹의 단어인가!
'응 비밀 알려줘!'
'너만 알아야해, 라면을 먹는 사람들은 몸이 라면처럼 꼬불꼬불해질거야.'
'왜? 나는 괜찮은데?'
'지금 말고, 나중에 말이야. 라면은 끓여도 꼬불 거리잖아, 국수는 끓여도 쭉쭉 뻗어 있는데'
맙소사, 라면을 먹으면 몸이 꼬불꼬불해진다니, 아빠는 그래서 라면을 안드셨구나. 아홉살 인생에 이런 충격은 없었다. 그 뒤로 나는 국물이 뽀얀 국수를 먹게 되었다. 그간 먹었던 라면을 지우기라도 하듯 말이다.
가끔 라면을 먹을 때, 내 몸이 꼬불거리는 상상을 하곤한다. 꼬불거리면 어떠랴. 진한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으면 이 세상 배부름이 아닌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