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시아지역 - 오스만제국의 발전
지난 글에서는 오스만제국의 성립과 메흐메트 2세, 셀림 1세를 알아보았어요. 이번 글에서는 오스만제국에서 대제라 불리는 슐레이만 1세와 셀림 2세를 알아보려 해요.
*슐레이만 1세(1520-1566)
오스만제국의 전성기는 슐레이만 1세 시기이다. 슐레이만 시기에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고 문화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뤘기 때문이다. 슐레이만 1세는 1526년 헝가리의 모하치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헝가리 군대에 큰 승리를 했다. 1529년에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요청으로 빈을 포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함락하지는 못했다. 이를 제1차 빈공격 실패라 한다.
카알 5세에게는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의 광대한 제국은 결코 통일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 독일은 영방국가와 자유도시의 연합체였을 뿐 아니라 영방군주들은 주권국가로서 독립하려는경향이 매우 강하였고, 때마침 루터의 종교개혁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게다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가 그 세력을 신장시켜 동남쪽으로부터 보헤미아와 헝가리를 침공하고 1529년에는 수도 빈을 위협하는 형세였다. 프랑수아 1세가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고, 그는 이교도인 투르크와 동맹을 맺는 것 까지도 사양하지 않았다.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2011, 335-336p
*콘스탄티노플 점령 및 비잔틴 멸망 : 메흐메트2세
*헝가리침공 : 1526년 모하치전투, 슐레이만1세
*수도 빈을 위협 : 슐레이만 1세
또한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에스파냐와 로마 교황의 연합 함대를 격파하여 승리 후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고 이에 동서 무역의 이익을 독점할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과 크리스트교 세계의 충돌, 프리베자 해전
1538년 9월, 오스만 함대와 신성 동맹 함대가 지중해 프레베자 근교의 아르타만에서 교전을 벌였다. 신성동맹은 교황령을 중심으로 베네치아, 에스파냐 등으로 구성된 크리스트교 연합 세력이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은 배 한 척도 잃지 않았으나, 신성 동맹은 10척이 침몰하고 3척이 불에 탔으며 36척이나 나포되는 피해를 보았다. 또 3,000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30여 년 후 레판토 해전에서 에스파냐에 패배하기 전까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15개정 천재교육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88p
*셀림2세(1566-1574)
전성기가 지난 후 오스만 제국은 차츰 약해지시기 시작했다. 지중해 대신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었기 때문이다. 1571년에는 에스파냐와의 레판토 해전에서 패배로 쇠퇴의 길로 빠지게 된다. 레판토해전은 오스만제국이 베네치아령 키프로스 섬을 빼앗으면서 시작이 된다. 오스만제국이 더욱 팽창할 것을 우려하여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가 연합한 것이다. 당시 에스파냐의 황제는 펠리페2세이다.
오스만제국은 1683년 제2차 빈 공격을 실패하고 헝가리를 상실하며 제국의 영토 축소 및 술탄칼리프의 지위 약화로 쇠퇴의 길을 가게 된다.
*참고문헌(문제시 삭제 하겠습니다)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2011, 335-336p
15개정 천재교육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88p